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3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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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2 05:47 조회 1,023회 댓글 0건본문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34
태환은 모니터 불빛만이 방안을 밝히는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카잔 전쟁’의 net플레이 대기실 화면의 선영 아이디는 로그아웃으로 표시돼있었고, 태환은 마치 중요한 걸 놓쳐버린 사람처럼 허망한 눈으로 모니터 위쪽 허공을 쏘아보았다. 아침이 오려면 아직 시간은 멀었으나 태환은 전혀 졸린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방안을 한바퀴 돌아보았고 벽에 붙은 하나의 포스터에서 동작을 멈칫했다. 조각으로 만들어진 듯한 거대한 인간 형상이 큰 창을 들고 바다를 누비는 모습이었다. 만일 누군가가 net에서 사용하는 그의 아이디와 이 포스터를 대조해본다면 연관성이 있으리라 짐작할 것이고, 왜 하필 그런 아이디에 집착하는지는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포스터를 바라보던 태환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
“나도 너 같은 여자를 만나서, 염증이 일 정도의 삶에서 그나마 마음의 휴식처를 얻었는지도 몰라.”
들을 사람 하나 없는 시각, 장소인 자신의 방 안에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태환.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들을 사람이 없기에’ 점차적으로 더욱 감정이 실린 색감으로 목구멍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선영. 너와 함께 있었던 나날들이 사랑이라 표현하기에는 치기 어릴지도 모르지. 아니, 그렇겠지. 우리 사이에는 진심을 담아서 사랑한다고 속삭여본 적도 없고, 네 말마따나 섹스를 나눠본적도 없으니까 말야. 그래. 섹스. 하하핫. 좋게 말하면 보다 정서적인 관계를 원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참 말해놓고 보니 나 같은 남자가 또 있을까 싶기도 하군. 그런데…….”
방안은 여전히 채칵거리는 시계바늘소리 외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태환의 목소리는 그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아는 진실된 교감을 하는 상대에게 말하는 것처럼 격앙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성격상 마지막 의지는 잠든 누군가를 깨우지 않게 하기 위한 발악처럼 제어했고, 그래서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튀어나오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난 널 좋아했어. 아니, 사랑했어. 그리고 너도… 날 단순히 친구 정도로만 생각했던 건 아니잖아. 네 대행자가 연애에 관한 기억이 지워진 범주에 나도 포함됐다는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하잖아. 그런데… 그런데…….”
뭔가가 울컥 하고 차오를 것만 같다. 하지만 태환은 곧 입을 다물고는 포스터로부터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치 연상의 오빠란 그렇게 약한 감성을 지닌 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는 것처럼. 그는 참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피식피식하고 웃기 시작했다.
“참 웃기는 녀석이야. 아니, 여전히 엄청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매너 없는 여자야. 너란 녀석은. 뭐? 나이프가 가장 만만해?”
태환은 오른손을 들어서 마치 나이프를 쥐는 것처럼 손가락들을 오그려보았다.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드라마를 너무 봤나? 나와 헤어지고 나서 극적인 드라마를 너무 본 모양이군. 은선영. 자신을 죽여달라는 게 다름 아닌 연인이 되는 것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존재들의 망상일 뿐이지. 흐흐…… 멍청한 녀석.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어. 나는 그렇게 대단한 짓을 저지를만한 위인이 못 돼. 선영 네 천재적인 두뇌는 사람 보는 눈에 있어서는 그다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군. 내가 뭐 하러 그런 짓을 도맡아 할까?”
그러나 별 거 아닌 망상처럼 치부하려는 그의 중얼거림과는 반대로 그의 손가락과 팔, 심지어 어깨까지 가눌 곳 없는 생명체처럼 흔들거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떨고 있었다. 태환은 갑자기 주먹을 쥐고 벽을 사정없이 강타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피가 베어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무는 선에서 그치고 말았다. 차분한 제어.
한량없이 흘러가는 시계바늘 소리를 들으며 벌을 받는 것처럼 서있던 태환은 서서히 몸을 낮추었다. 그렇게 방 안에 주저앉은 태환은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는 입술을 음미하고는 손을 뻗어 탁상위에 있는 티슈를 찾았다. 티슈 상자는 그의 불안정하게 떨리는 손아귀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으나 태환은 보지도 않고 구겨지듯 뽑아든 티슈로 입가를 닦았다.
“다시 나오든 말든 내가 알아서 할 건 아니야. 이 참에 핸드폰도 끄고 살아볼까? 그래, 그 편이 낫겠어.”
그러나 내뱉는 말과는 달리 태환을 절대로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무시하고도 남을 어처구니없는 부탁이다. 하지만 그는 선영과 함께 있었던 시간만큼이나 그녀가 내뱉은 말의 무게감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지 않으면 더 나쁜 파국으로 치달을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벽 사이에 죽지도 못한 상태로’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몰랐으나 자신의 죽음을 마치 타인 대하듯 여기는 선영의 타입으로 봐선 가볍게 말해졌다고 해서 절대로 가벼울 건 아니었다. 태환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고 동시에 선영이 그러한 그의 생각을 이용했다는 것도 와닿았다.
정말이지 무서우리만큼 똑똑하고 가차없는 년이야.
태환은 미소는 지우지 않았지만 젖은 눈을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방 천장은 컴퓨터 모니터의 불빛으로 인해 형형한 빛을 띠고 있었다. 마치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그것을 바라보던 태환은, 나이로는 위이지만 자신이 선영보다 한 단계 아래의 존재임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담배를 찾을 생각도 못하고 허공을 향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은 그만큼 무게감있는 존재였다는 점만 추출하여 위안으로 삼으려 애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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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이 거주하는 원룸 건물은 약간 언덕길 위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진은 2층에 있는 자신의 원룸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건물 문 앞에 나와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에 푸르스름한 새벽 기운이 감싸고 오는 시각이었다. 겨울로 치달아가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차가운 밤바람이 성진을 맞이하고, 감싸고, 스며들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별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재킷 주머니에 손도 넣지 않은 상태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르막길 아래쪽을 향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역시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선영의 머리카락은 여느 때처럼 차가운 새벽바람에도 미려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목 언저리까지만 내려오는 길지 않은 스타일이었으나 머릿결은 고왔고 조금 강한 바람이 불면서 그녀의 얼굴 앞으로도 쓸려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러나 선영은 그 머릿결을 정돈할 생각은 없는 듯 그저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조금 위로 해 성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감정 없는 듯한 시선은 그렇게 얼마간 대치하였다. 이윽고 평화로운 대치 상태는 성진이 발걸음을 옮김으로 인해 위태로운 분위기로 치달았고, 선영은 가만히 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성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수십 미터의 거리가 한자리 수의 미터로 좁혀지고, 곧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고 좁혀졌다. 서로는 그때까지도 약속이나 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완전히 밀착할 정도로 다가갔을 때.
성진은 두 팔을 선영의 등 뒤로 감싸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괜찮나? 잘 돌아왔어 등등의 인사는 없었다. 그냥 말없이 끌어안아도 성진은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또 대답을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선영은 그런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대신 약 몇 초간의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입이 덤덤히 열렸고, 그것은 그 어떤 제지보다도 효과적으로 성진을 동요하게 만들었다.
성진이 정말로 동요한 건 본래의 선영이 다시금 튀어나왔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당사자가 다름 아닌 자신의 친구 동혁이 범했다는 사실 때문만도 아니었다. 성진은 이렇게 가까이서 껴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전보다도 더욱 먼 곳으로 멀어졌다는 기분을 도무지 부정할 수 없었다. 차분히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생동감이 없었고, 가슴에서 숨소리는 느껴질지언정 두근거림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성진은 마치 죽은 통나무로 만들어진 인간을 끌어안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그녀를 끌어안는 손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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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무슨 생각하세요?”
“…….”
“선배에~”
곁에 걷고 있던 미선이 늘어지는 음성으로 성진을 부르며 팔짱을 조금 당기어서야 성진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싶게 미소 띤 얼굴로.
“응? 왜?”
가로등이 켜진 밤길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둘의 행보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늘상 그렇듯 편의점 일이 끝나고 함께 돌아가는 길을. 그리고 미선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그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지 않을 만한 선에서 가볍게 물어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선배? 아까부터 한마디도 안 하시고 넋 나간 것처럼 멍하니.”
“그랬나? 미안….”
“혹 고민 있어요?”
“아무것도 아냐.”
“흐음, 선배. 보기보다 여자 마음에 스크래치 만드는 데 소질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성진은 그제서야 미선을 제대로 바라보며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그녀는 때맞춰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딴 데로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성진은 한번 더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고는 한숨을 쉬듯 고개를 땅으로 떨구었다. 가로등의 빛은 위쪽에서 비추어대고 있었기에 그의 얼굴은 상념으로 고민하는 내면에 맞추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얼마 후, 미선은 샐쭉해진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어제 그 클럽에서 급하게 나가셨던 문제와 관련있는 건가요? 그러고 보니 선배 어제 왜 그렇게 급하게 가신 거였죠? 끝까지 저한텐 아무 말도 안 하시고….”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늦겠다. 얼른 가자.”
결국 미선 쪽이 두 손 들었다는 시늉으로 그의 팔짱을 풀고는 자신의 뒷머리를 깍지 껴서 받치었다. 그녀는 그렇게 기지개를 켜는 동작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누구 들으라는 듯이 조금 큰 목소리를 내었다. 손가락 너머로 찰랑거리는 포니테일 머리칼이 가로등 불빛을 곱게 반사한다.
“예에, 그러시겠죠. 나의 흑기사는 혼자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이시니까.”
‘공주님 흑기사정도 되려면 이정도 스팩은 기본이지요’ 같은 낯간지러운 말이라도 들려오지 않을까 생각해보던 미선. 그리고 여전히 정적만이 감도는 분위기를 감지하자 슬며시 눈동자만 돌려 성진을 다시 바라보았다. 전날 그녀가 선물한 목도리는 두르고 있었으나 여전히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땅만 바라보고 걷는 모습.
그냥 오늘은 그만 끼어들어야겠다고 미선이 마음을 먹을 때쯤이었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한가지 가설이 떠올랐고 별 근거는 없지만 그런 루트라도 하나 던져보기로 했다.
“혹시 엠티 때문이에요? 기일이 연장되고서도 선배한테 아무런 말도 없이 가버렸잖아요.”
“…그래, 엠티. 동혁 그 자식!”
급작스럽게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지르는 그의 모습에서 미선은 짧은 시간동안 자신의 제대로 짚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미선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온건한 착각이었는지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성진이 문득 걸음걸이를 멈추더니 재킷 주머니에서 손을 빼들어 옆 전봇대를 주먹으로 후려갈겼기 때문이다. 퍼억-!
으스러지는 듯한 손의 아픔이 귓가로 전해지는 느낌에 미선은 몸을 움찔 하고 떨었다.
“선배…?”
“하아… 하아……. 이런 젠장할.”
“제… 제가 잘못했어요, 선배. 안 물어볼게요. 죄송해요.”
“아냐, 그것 때문이 아냐. 물론 그것도 문제긴 하지만….”
“네…?”
하지만 성진은 더 대답하지 않고 재킷 주머니에 손을 다시 찔러넣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미선은 멍청한 표정으로 그런 선배를 바라보다가 서둘러서 총총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는 한번 돌아보지도 않는 성진의 등뒤에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손… 괜찮아요?”
무언의 대답. 미선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었다고 자학하면서 어쩔 줄을 모른 채 그의 뒤만 따라갔다. 그리고 사실 그런 시간도 얼마 가지 않았다. 어느 새 그들의 목적에 근거한 곳까지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미선의 집 앞에서 그들은 잠시 어색하게 서있었다. 미선은 쭈뼛쭈뼛한 시선으로 선배의 눈치만 살폈고, 그런 시간이 길어봐야 좋을 건 없다는 것 정돈 알고 있었기에 성진은 얼른 표정을 풀었다. 그리곤 그녀의 어깨를 옆으로 한번 톡 쳤다.
“들어가. 내일부턴 또 한 주의 시작이니 푹 쉬어야지.”
미선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들어갈 생각은 없는지 핸드백을 뒤로 모아쥔 채로 성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눈치챈 성진은 살짝 입김이 나오도록 숨을 들이쉰 후에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공주님?”
미선은 킥 하고 한번 웃고는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만 약간 옆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선배. 내일 영화라도 한편 보러 가지 않을래요?”
별로 그럴 기분은 아니었지만 이런 귀여운 후배의 제안을 거절할 성격은 못 되었기에 성진 역시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뭐 재미있는 거라도 있나?”
“음…. 자세한 건 인터넷을 봐야 알겠지만 ‘나블라’가 요즘 뜨는 것 같던데요.”
“역삼각형? 미스터리물 같군.”
미선은 고개를 끄덕였고 성진은 잠시 다음날의 스케줄을 머릿속으로 스캔해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그녀를 가만히 마주보기 시작했다. 대답을 기다리던 미선은 갑자기 자신을 찬찬히 훑어보는 듯한 성진의 시선에 의아해졌고, 조금 후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가눌 데를 찾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성진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왜… 그러세요, 선배?”
“아냐, 그냥 잠시 딴 생각이 들어서.”
전날 클럽에서 본의 아니게 정사를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 대하듯 얘기를 나누는 미선. 그런 그녀를 보며 성진은 후배의 성격을 어느 정도 정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성적인 사람은 보편적으로 약해보이지만 실상 피상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특정 분야에서 놀라운 수용력을 보여주기도 하며 적응하는 과정 또한 뛰어날 수 있다. 단지 남들과는 조금 다른 관념이란 것이 크게 작용하는 부분이다.
쌀쌀함 속에서 오래 서있게 하는 것도 매너가 아니었기에 성진은 그쯤에서 생각을 닫고는 고개를 들어 가볍게 주억거렸다.
“뭐 괜찮겠지. 시간은 언제로 할까? 난 내일 수업이 이른 오후에 끝나니….”
“음…. 아니요. 역시 안 될 것 같아요.”
“……?”
성진은 잠시 무슨 소리냐는 시선으로 미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알쏭달쏭한 미소로 그를 마주보았고, 성진이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 내일 영화 보는 건 없던 걸로 해요. 다음에 시간 나면 다시 약속 잡죠 뭐.”
“아까일 때문에 그런 거야? 너와는 관계 없는 거야.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그냥 짜증이 좀 나서….”
하지만 원인을 찾아보려는 성진의 노력과는 달리 미선은 그와는 별개의 생각에 치중돼있는 것 같다. 그녀는 여전히 뒤로 가방을 모아쥔 채로 선배를 향해 몸을 살짝 숙여 보였다. 그렇잖아도 성진에 비해 키가 작은 그녀로서는 완연히 시야 높이가 달라졌지만 성진은 어쩐지 그녀가 올려다보는 게 감춰진 무언가를 들추는 기분이 들어서 꺼림칙해졌다. 성진은 난처해지는 기분에 버릇처럼 주머니에서 한쪽 손을 빼들어 뺨을 긁적였다.
그리고 그런 성진이 ‘갑자기 내일 해야할 일이 생각난 거야?’라고 물어보려던 찰나.
“선배, 좋아하는 여자 있죠?”
“뭐…?”
성진은 흠칫하듯 한걸음 물러났지만 미선은 거의 동시에 미소를 풀지 않으며 한걸음 다가섰다.
“무난하게 ‘챙겨주고 싶다’거나 ‘친하게 지내고 싶다’같은 뜨뜻미지근한 감정 말구요. 정말로 좋아하는 감정 있잖아요. 음… 뭐랄까. 진부한 표현이지만 ‘달콤하고 로맨틱’보다 더 근접한 표현을 찾기 어려운 연애적인 감정이랄까요?”
“너 가끔씩 너무 날카롭다?”
“흐음, 그렇게 도망가시면 안 되죠.”
“소희 말하는 거야? 걔하고도 뭐 이런저런 일을 안 했다고는 부정할 순 없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 아냐.”
하지만 미선은 아직 핀트에 맞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아하는 여자하고만 정사를 나눈다는 해묵은 연애관념에 얽혀있을 정도로 저도 순진하진 않아요. 뭐 그럴만한 나이가 아니기도 하고. 선배는 어제 저하고 그렇고 그런 일을 벌리기는 했지만 선배가 정말로 마음에 품고 있어서 그랬을 거란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어요. 그러니까 공주님의 물음에 대답해보시죠, 기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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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