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천사 -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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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2 13:28 조회 663회 댓글 0건본문
5. 기억의 흔적들
등이 아프다. 허리가 아프다. 손이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 온 몸이 아프다. 그러나 머리는 시원하다. 가득하던 생각의 뒤엉킴이 바람에 날아가듯 잊혀지고, 오직 등에 진 무거운 시멘트포대를 지정된 장소까지 옮겨가기 위해 땀을 흘린다. 아무 복잡함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오늘 해야 할 일만 존재하는 곳. 여기는 내 삶의 피난처, 내 의식의 휴식처다.
“박씨! 담배 한 대 피고 하지.”
“저 담배 안 피우는 것 아시잖아요.”
“내가 피우려고 그러는 거지.”
“이거 옮겨야 하는데요.”
“내가 십장인데 누가 뭐래?
“아, 현장감독님도 계시잖아요.”
“현장감독이 일해? 내가 일하는 겨! 내가 안 움직이면 여기 공사 끝이야.”
“하하하…… 십장님도 참. 그러세요. 일단 이거 올려 놓고요.”
“같이 가세. 담배도 높은 데서 펴야 맛있거든.”
벽체도 없이 기둥만 솟아있는 4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땀을 식힌다. 아직 개발이 한창인 곳이라 여기저기 빈 땅도 많고 공사중인 곳도 많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이 도시가 처음 개발되면 제일 먼저 지어지는 것이 대부분 모텔 같은 숙박시설이다. 하긴 그래야 일하는 사람들도 지낼 곳이 생기기 때문일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여기도 한 반년만 지나면 몰라보게 달라질 거야.”
“그렇겠죠?”
“그럼! 내가 공사판에서 벌써 40여년을 보내고 있는데 요샌 예전보다 공기가 짧아도 너무나 짧아졌어. 하긴 기술도 자재도 다 좋아져서 그렇겠지만, 덕분에 우리같이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일할 곳을 찾아 자주 떠돌아 다니게 됐지. 후후……”
“그런 면도 있겠군요.”
“세상이 변하듯 일도 변하고 그러니 사람도 변해야 하는 거지.”
“심오한 말씀이군요.”
“심오는 무슨!”
“원래 삶의 지혜가 그 가치로는 최고죠. 하하!”
“자네 사람 다룰 줄 아는구먼. 허허……”
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낸다. 주름진 얼굴과 검게 탄 것인지, 원래 피부가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는 까만 얼굴이 누군가의 사진작품 속 인물 같다.
“전에도 그랬지만 자넨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나?”
“먹고 살려고 그런 거죠 뭐.”
“허, 내가 배운 게 없다고 사람까지 못 알아보지는 않네. 자넨 도무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야.”
“직업에 무슨 귀천이 있나요? 하게 되면 하는 거죠.”
“자네 처음에 날 찾아왔을 때 그랬지? 돈은 상관없고 일만 하게 해달라고.”
“그랬었죠.”
“돈 때문에 이 힘든 일도 하려는 건데 힘든 일을 돈과 상관없이 하겠다는 말에 난 또 어디서 어줍잖은 인간 하나 왔나 보다 했었지.”
“어줍잖은 인간인건 지금도 마찬가지 같은데요. 아직도 다른 분들에 비하면 제 몫을 다 한다고 하긴 어려우니까요.”
“아니야, 아냐. 요샌 충분히 한 사람 이상의 몫을 하고 있어. 처음과 비교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할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자네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말야. 그것도 꼭 남들 놀려고 하는 토요일, 일요일만 골라서. 이제쯤 털어놓을 때도 되지 않았나?”
“글쎄요……”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특별한 건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려서 제가 평소에 하고 있는 일은 머리가 좀 복잡한 일이거든요.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일을 시작한 거죠. 육체를 쓰면 머리가 쉬거든요. 후후……”
“그랬군. 그랬어. 어쩐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배운 티를 숨길 수는 없는 법이지. 그래 원래 하는 일은 뭔가?”
“십장님만 알고 계세요. 다른 분 아시면 공연히 미움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거야 당연한 거지.”
“저 실은 정신과 의삽니다.”
“정신과 의사?”
“네.”
“머리 좀 이상한 사람들 상대하는?”
“꼭 그런 건 아니구요. 요즘 세상이 복잡하고 스트레스가 많으니 그런 것을 상담해주는 거죠. 다른 사람들의 머리를 좀 쉬게 해주는 역할이라고나 할까요?”
“음…… 이제 알겠군. 그런 일을 하다 보니 자네가 오히려 머리가 아픈 게로군. 그래서 자네는 역으로 머리를 쉬게 해주려고 이 일을 하는 거구만.”
“네. 맞습니다.”
“그랬군. 이유를 알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네 그려. 하하하……”
“그렇게 궁금하셨어요?”
“당연하지!”
“그럼 진작에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이 사람아, 여기 오는 사람들 중에 복잡한 사연 없는 사람이 있는 줄 아나? 그래서 여기선 일에 필요한 것 말고는 물어보지 않는 게 법이라네.”
“하긴……”
“그런 이유라면 괜찮군. 가끔 뭔 해방운동이니 노동운동이니 하는 젊은 친구들이 이념이 어쩌고 무슨 원리가 어쩌고 민주니 평등이 어쩌고 하면서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분위기 흐리는 경우도 있어서 문제긴 하지만, 자네 같은 이유라면 딴 사람들이 알아도 뭐라고 하진 않을 게야.”
“그런가요?”
“여기 일하는 사람 중에도 한 때 제법 잘 나가던 사람도 드문드문 있다네. 그렇다고 해도 머리로 일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거지. 대부분 정직하게 일해서 버는 것이 좋은 사람들이거든. 그래서 그런지 복잡한 건 딱 질색하기도 하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몸이 가는 걸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이지.”
“네……”
“세상엔 참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어. 나 같이 배운 거라곤 이것 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평생 이 짓 해서 먹고 사는 사람도 있고, 잘 나가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망해서 정말 오갈 데 없이 몸뿐이라 이 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세상이 귀찮아 일부러 이 일을 찾는 사람도 있고. 참 자네 결혼은 했나?”
“아직 전입니다.”
“그래? 사귀는 사람은 있고?”
“아뇨.”
“흠… 내가 소개라도 좀 해줄까?”
“아닙니다. 아직은 결혼을 생각하고 싶지 않군요.”
“왜?”
“그냥요.”
“허허…… 그것도 사연이 있는 모양이로군.”
“……”
김광석은 왜 죽었을까? 가끔 김광석이 죽기 바로 전날 불렀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우연치 않게 그의 마지막 방송을 보았던 나는 다음 날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에 친구들이 심한 장난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것이 정말임을 알았을 때 또 다른 데자뷰를 보는 것 같았고, 깊이 감추었던 무서운 기억의 흔적이 나를 휘청이게 만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그 날, 나는 내 방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다음 날 다시 해가 뜰 때까지 온 몸을 떨었다. 어디선가 하얀 옷을 입은 엄마가 손짓하며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문을 열면 여전히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 쪽에 무섭게 눈을 뜨고 줄에 매달린 엄마의 모습이 보일 것만 같았다.
“나는 말야, 저 노래만 들으면 우리 애 생각이 나. 가끔 지 방에서 혼자 저 노래를 부르곤 했었거든.”
“자녀분요?”
“응. 큰 애. 살아있었다면 올해로 41살이 되지.”
“네……”
포장마차 기둥에 매달린 낡은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던 황십장이 소주를 목구멍에 털어 넣으며 다시 잔을 채웠다. 그리고 다시 털어 넣고, 채우기를 연거푸 세 번을 하고서 빈 소주병을 확인하곤 술 한 병을 더 시켰다.
“그 자식,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공부도 잘하고 대학도 떡 하니 지 가고 싶은데 붙고, 인물도 훤하고 성격 좋고 뭐하나 빠지는 게 없었는데 말야…… 허……”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게 말야…… 2학년 마치고 군대를 갔는데, 가서 몇 달 만에 갑자기 연락이 왔더라고. 애를 찾아가라고. 자살을 했다나? 어이가 없더군. 해서 허겁지겁 달려갔더니 정말 우리 애가 누워있더라고. 냉동실에서 차갑게 얼어서 말야. 기가 막히더군. 세상에 그런 일도 있을까 싶었어.”
“네……”
굴곡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시대도 어두운 때가 있고 치욕스러운 시간이 있고 고통의 시간이 있거늘, 하물며 버러지같이 살아가는 이름없는 민초의 삶이야 더 말할 것이 있으랴!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아무도 말을 안 해주더라고. 그 애가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얼핏 봐도 여기저기 멍자국에 상처가 한 두 군데가 아니던데 이런 저런 조사고 뭐고 간에 자살이라는 거야. 억울하고 원통하더군.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도 보고 민원도 넣어보고 했는데 다 소용이 없더라고. 나중에 세월 지나서 잊을 만 하니 뭔 의문사 조사를 한다고 난리를 치더니만 오만 군데서 찾아와서는 사람 속을 시끄럽게 하더구만. 차라리 처음부터 제대로 조사한다고 했으면 속이라도 답답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긴 시간 동안 하소연할 데 없이 속만 태웠는데 그 자식 가슴에서 그나마 겨우 묻어뒀다 싶었더니 지들 멋대로 마구 헤집고 말야…… 결국 마누라만 병 나서 또 아들놈 뒤따라 보내고 눈물도 다 마르게 하더라고. 그러고도 여태 살아있는 걸 보면 나도 참 용해. 그렇지?”
잔을 들어 나도 황십장처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목이 따갑도록 갈증이 밀려왔다. 포장마차를 흔들며 한 차례의 큰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어느새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서둘러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제길, 보아하니 내일은 비 때문에 일 못하겠군.”
“그러게요. 제법 많이 올 거 같네요.”
“뭐, 잘 됐지. 그 덕에 쉬기도 하니까.”
“쉬는 날엔 뭐하세요?”
“할게 뭐 있나? 그냥 빗소리 들으며 방바닥에 등 붙이고 누워서 잠이나 자는 거지.”
“건강 잘 챙기세요.”
“내 걱정은 마. 아직 20년은 끄떡 없어. 둘째 녀석 손주도 봐야 하고.”
“둘째도 아들인가요?”
“아냐, 딸. 그 애 때문에 내가 여태 살아있는 셈이지. 그 애도 없었다면 아마 애 저녁에 마누라 따라 갔을 거야.”
“네……”
“우리 딸 애가 결혼한지는 벌써 몇 년 됐는데, 아직 아이가 없어. 그래서 걱정이야. 몸이 어디가 안좋은지, 아니면 부부 사이가 문제가 있는지……”
“정상적인 부부들도 아이가 쉽게 들어서지 않는 경우가 많은 걸요. 조금 더 기다려 보세요. 곧 소식이 있겠죠.”
“그러면 좋겠구만.”
삶이 고행이란 건 살아가면서 더욱 느끼는 것이다. 또 내게 찾아오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 없는 삶의 무게를 느끼곤 한다. 누군가는 그렇게도 쉽게 살아가는 것을 대다수의 사람들은 몸부림치며 안간힘을 써야 하고, 때로는 그래도 되지 않아 심연 같은 좌절을 겪게 되곤 한다. 인생은 이렇게도 불공평하다. 제기랄!
택시를 타고 떠나는 황십장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한동안 비를 맞으며 그대로 서 있었다. 잊혀졌던 과거의 기억이 자꾸만 비 속에 선명해져 왔고, 그럴수록 마음은 점점 더 추워만 갔다. 전화기를 꺼내 이양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라면 지금 이 추운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얼마나 신호음이 갔는지 모른다. 그러다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멘트에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어디로 가야 할지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핸드폰 속에 있는 다른 이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 말아야 할 전화를.
“여보세요?”
“수호천사!”
“……”
“남편 들어왔어요?”
“아뇨. 오늘 아침 해외출장을 갔어요.”
“아이는요?”
“자요.”
“분당 M 아파트죠?”
“네.”
“몇 동인가요?”
“107동요.”
“30분 후에 아파트 옥상문 앞으로 나와요.”
“네.”
전화를 끊을 즈음 저기 달려오는 빈 택시가 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택시!”
천둥과 번개가 수시로 오가는 굵은 빗줄기 사이를 택시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이미 시간은 출발한지 40분을 넘기고 있었고 마음은 자꾸 조급해졌다. 그녀는 지금 내가 암시해 놓은 단어로 인한 최면 상태인 채로 아파트 옥상 문 앞에서 멍하니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만약 다른 누군가라도 그녀를 발견하게 된다면 향후에 난처한 입장이 될지도 모르거니와 혹여 나쁜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벌써 몇 번을 전화 했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그녀로서는 핸드폰을 챙겨 나가지 못했을 확률이 컸다. 공연한 충동적 행동 하나가 나 자신을 심하게 자책하게 하고 있었다. 기어코 20분을 더 지나 아파트 앞에 섰을 때, 나는 또 나 자신을 원망했다. 일반 아파트와는 다르게 이 아파트는 입구에 비밀번호가 있어야 문을 열 수 있는 구조. 전화도 되지 않는 지금 그녀에게 연락할 길은 없었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잠시 한쪽 옆에 서 있다 힘없이 돌아서는 순간 안에서 나오는 누군가로 인해 문이 열렸고 나는 다시 문이 닫히기 전 서둘러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다행히 나오던 사람은 처음부터 우산으로 앞을 가리고 있어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빠르게 솟는 엘리베이터마저 느리게 느껴졌고 마음은 이미 계단을 마구 뛰어올라가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중간에 서지도 않았다. 마지막 23층에서 다시 옥상을 향한 계단을 서둘러 올라갔다. 등도 없는 그곳은 그저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있는 비상구등이 그나마 희미하게 계단과 문의 형상을 알아볼 수 있게 해줄 뿐이었다.
옥상으로 나가는 문 앞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허탈한 실망감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없었던 것이다. 혹시나 싶어 문을 열어봤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도중에 최면이 풀렸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오히려 다행일 것이다. 별탈 없이 집으로 돌아갔을 테니까.
나도 이번처럼 암시단어에 의한 원거리 최면의 시도는 처음이었다. 과연 잘 되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사실 최면은 최면 대상자의 의지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대부분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을 최면의 상태로 이끈다는 것은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제대로 된 최면을 위해서는 대상자와 시술자간의 유대와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다. 상대방의 의지에 반하는 최면은 그야말로 고도의 최면기술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극히 어려운 일이다.
돌아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렇게 앉아있으니 공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나는 왜 그토록 무모하고 위험한 시도를 했었던 걸까? 만약 그녀가 내 뜻대로 이곳에서 나를 기다렸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그녀를 범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이후의 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시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상하게 나를 흥분시키던 그녀의 물기 어린 뽀얗게 하얀 피부. 모나지 않게 동그란 느낌의 눈, 코, 입, 그리고 얼굴의 형태. 대략 163, 4 정도 되어 보이는 키에 아주 마르지 않은 균형잡힌 몸매. 치마를 입었을 때 아래로 보이는 다리의 강렬한 육감적 모습. 내 물건이 급격히 팽창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나는 주체하기 힘든 육욕에 휩싸이곤 했고 지금도 그러했다. 전화기를 손에 들고 나는 망설였다.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다시 나오라고 할까? 시계는 이미 새벽 한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선생님!”
“헉!”
나는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서 뒤를 돌아보다 그만 휘청이며 계단 아래로 떨어질 뻔 했다. 간신히 난간을 붙잡고 균형을 잡은 나는 난간에 비스듬히 기댄 채 몇 계단 위에서 서있는 검은 코트의 그녀를 바라봤다.
“현주씨……”
“네, 선생님.”
일요일이라 병원 문도 열지 않는 데도 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병원으로 와서 상담용 의자에 누워 열선을 최고로 높여 놓고 담요를 덮어 잠을 청했다. 온 몸이 이렇게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울 수가 없었다. 샤워를 하고 나서도 몸의 피로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침대에 누워있자니 몇 시간 전의 일들이 영화처럼 선명하게 머리에 그려졌다. 강현주, 그녀의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 그 입술 속을 헤집던 내 혀에 느껴지던 전율스러운 감촉들. 그녀의 긴 숨소리와 뜨겁게 뿜어져 나오던 단내. 적절한 순간에 내 흥분을 이끌던 그녀의 신음소리. 손에 닿는 그녀의 매끄럽고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끈적하게 붙어오던 그녀의 살결들. 그녀의 몸 속에 마침내 들어섰을 때 느껴지던 그 짜릿하고 가슴 터질 것 같던 흥분감. 내 중심을 가득 잡아오던 무수한 지렁이들의 꿈틀거림 같은 신비한 감촉. 들고 날 때마다 리듬을 맞춰오던 그녀의 움직임. 그것은 줄다리기처럼 일정의 간격을 두고 서로의 힘을 겨누는 것처럼 격렬하고 때로 일방적이고 때로 하나인 듯 일치된 춤과 같았다. 출렁이는 그녀의 가슴과 느낌 좋은 유두를 한입 베어 물고 아이처럼 빨아 당길 때마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던 급격한 파동들. 그 파동을 타고 나는 점점 더 그녀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그녀는 나와 함께 깊고 거친 소용돌이 속에 몸을 던졌다.
그녀는 나를 기다리며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고 했다. 검은 외투가 그런 그녀를 어둠의 일부분으로 완벽히 동화시켜줘 누구라도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 앞으로 간 나는 그녀를 구석진 곳으로 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 눌렀다. 그녀는 아이처럼 내 손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고 마침내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손을 얹은 자세로 앉아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나는 지퍼를 내렸다. 금새 커진 육봉이 튀어나오며 그녀의 얼굴을 향해 무섭게 도드라졌지만 그나마 어둠이 그 무서움을 감소시켜줬다. 나는 내 물건을 한 손으로 잡고 그녀의 입술에 닿게 했다. 그리고 말했다.
“빨아줘.”
그녀는 아무 망설임 없이 두 손으로 내 물건을 잡고는 입술을 열어 내 물건을 받아들였다. 따뜻하고 축축한 그녀의 입안이 내 물건을 더욱 흥분되게 했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거칠게 그녀의 입 속을 찔러대고 싶었지만 그녀의 행동은 그저 단순한 반복에 불과했다. 이빨의 처리도 확실치 않아 조금 아프기도 했다.
“이빨이 닿지 않게. 혀와 입술로만.”
내 말에 따라 그녀는 즉시 자신의 혀와 입술만을 사용했다. 기술은 없었다. 그녀 스스로 그런 경험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머리로 생각해서 되는 것이 아닌 본능적인 움직임과 경험의 산물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부드러움이 주는 편안함에 나는 내 물건을 더 깊이 들이밀었다. 숨이 막히는지 그녀가 내 물건을 잡고 밀어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냥 받아들여!”
그 한마디에 그녀는 순종적으로 나의 분신을 받아들였다. 숨이 막혀 컥컥거리며 침을 흘리면서도 뱉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나를 더 흥분하게 했고 내 행동을 더 거칠게 했다. 나는 커질 대로 커진 내 물건을 그녀의 목구멍까지 깊이 밀어 넣었다. 목젖이 닿는 느낌이 확실해졌다. 기도가 막히고 숨을 쉬지 못하는 그녀를 느끼면서도 나는 더 깊이 넣기를 멈추지 않았다. 한 순간 내 움직임이 빨라졌다가 멈추었다. 서서히 내 물건도 작아져 갔고 그녀도 숨을 쉬는 것이 편해진 것 같았다.
아직도 그녀의 입안에 있는 내 물건을 천천히 빼냈다. 끝에서 끈적한 줄기 하나가 길게 흘러 내렸다. 그녀가 어떻게 할까 싶어 잠시 기다렸지만 그녀는 내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듯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삼켜.”
그녀의 목이 움직여 내 분신들을 넘기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다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집으로 가.”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 집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혹시 몰라 아이방의 문을 살며시 열어봤다. 창가로 들어오는 불빛에 깊이 잠든 아이의 모습이 보였고, 나는 그제서야 몸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엄마가 없었던 시간 동안 잘 자고 있어준 아이가 고마웠다.
그들 부부의 침실로 들어가서의 느낌은 아주 특별했다. 비록 남편이 해외출장이란 확실한 부재상태였을지라도 마치 그녀의 남편이 한 켠에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침대 옆 작은 등을 켜고 침대 끝에 서서 나는 그녀의 옷을 모두 벗겼다. 서두르지는 않았다. 한지로 감싸인 그 작은 등에서 나오는 빛은 은은하게 서서히 들어나는 그녀의 나신을 더욱 눈부시게 했다. 내가 자신의 옷을 벗기는 동안 그녀는 편안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나는 일부러 그녀의 눈을 보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의 속옷 하나만을 걸쳐두고 나는 핸드폰을 화장대 옆에 세워놨다. 동영상 녹음버튼이 눌러진 상태였다.
“벗어.”
내 말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마지막 속옷을 벗어서 바닥에 내려놨다.
“내 옷도 벗겨줘.”
부드러운 그녀의 손길이 나를 점차 아이처럼 만들어갔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 내가 아직 남자와 여자의 확실한 구분의 개념이 없던 시절, 내 옷을 벗기고 따뜻한 물이 받아진 욕조에서 내 몸을 씻겨주던 엄마의 손길과도 같았다.
등이 아프다. 허리가 아프다. 손이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 온 몸이 아프다. 그러나 머리는 시원하다. 가득하던 생각의 뒤엉킴이 바람에 날아가듯 잊혀지고, 오직 등에 진 무거운 시멘트포대를 지정된 장소까지 옮겨가기 위해 땀을 흘린다. 아무 복잡함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오늘 해야 할 일만 존재하는 곳. 여기는 내 삶의 피난처, 내 의식의 휴식처다.
“박씨! 담배 한 대 피고 하지.”
“저 담배 안 피우는 것 아시잖아요.”
“내가 피우려고 그러는 거지.”
“이거 옮겨야 하는데요.”
“내가 십장인데 누가 뭐래?
“아, 현장감독님도 계시잖아요.”
“현장감독이 일해? 내가 일하는 겨! 내가 안 움직이면 여기 공사 끝이야.”
“하하하…… 십장님도 참. 그러세요. 일단 이거 올려 놓고요.”
“같이 가세. 담배도 높은 데서 펴야 맛있거든.”
벽체도 없이 기둥만 솟아있는 4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땀을 식힌다. 아직 개발이 한창인 곳이라 여기저기 빈 땅도 많고 공사중인 곳도 많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이 도시가 처음 개발되면 제일 먼저 지어지는 것이 대부분 모텔 같은 숙박시설이다. 하긴 그래야 일하는 사람들도 지낼 곳이 생기기 때문일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여기도 한 반년만 지나면 몰라보게 달라질 거야.”
“그렇겠죠?”
“그럼! 내가 공사판에서 벌써 40여년을 보내고 있는데 요샌 예전보다 공기가 짧아도 너무나 짧아졌어. 하긴 기술도 자재도 다 좋아져서 그렇겠지만, 덕분에 우리같이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일할 곳을 찾아 자주 떠돌아 다니게 됐지. 후후……”
“그런 면도 있겠군요.”
“세상이 변하듯 일도 변하고 그러니 사람도 변해야 하는 거지.”
“심오한 말씀이군요.”
“심오는 무슨!”
“원래 삶의 지혜가 그 가치로는 최고죠. 하하!”
“자네 사람 다룰 줄 아는구먼. 허허……”
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낸다. 주름진 얼굴과 검게 탄 것인지, 원래 피부가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는 까만 얼굴이 누군가의 사진작품 속 인물 같다.
“전에도 그랬지만 자넨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나?”
“먹고 살려고 그런 거죠 뭐.”
“허, 내가 배운 게 없다고 사람까지 못 알아보지는 않네. 자넨 도무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야.”
“직업에 무슨 귀천이 있나요? 하게 되면 하는 거죠.”
“자네 처음에 날 찾아왔을 때 그랬지? 돈은 상관없고 일만 하게 해달라고.”
“그랬었죠.”
“돈 때문에 이 힘든 일도 하려는 건데 힘든 일을 돈과 상관없이 하겠다는 말에 난 또 어디서 어줍잖은 인간 하나 왔나 보다 했었지.”
“어줍잖은 인간인건 지금도 마찬가지 같은데요. 아직도 다른 분들에 비하면 제 몫을 다 한다고 하긴 어려우니까요.”
“아니야, 아냐. 요샌 충분히 한 사람 이상의 몫을 하고 있어. 처음과 비교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할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자네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말야. 그것도 꼭 남들 놀려고 하는 토요일, 일요일만 골라서. 이제쯤 털어놓을 때도 되지 않았나?”
“글쎄요……”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특별한 건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려서 제가 평소에 하고 있는 일은 머리가 좀 복잡한 일이거든요.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일을 시작한 거죠. 육체를 쓰면 머리가 쉬거든요. 후후……”
“그랬군. 그랬어. 어쩐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배운 티를 숨길 수는 없는 법이지. 그래 원래 하는 일은 뭔가?”
“십장님만 알고 계세요. 다른 분 아시면 공연히 미움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거야 당연한 거지.”
“저 실은 정신과 의삽니다.”
“정신과 의사?”
“네.”
“머리 좀 이상한 사람들 상대하는?”
“꼭 그런 건 아니구요. 요즘 세상이 복잡하고 스트레스가 많으니 그런 것을 상담해주는 거죠. 다른 사람들의 머리를 좀 쉬게 해주는 역할이라고나 할까요?”
“음…… 이제 알겠군. 그런 일을 하다 보니 자네가 오히려 머리가 아픈 게로군. 그래서 자네는 역으로 머리를 쉬게 해주려고 이 일을 하는 거구만.”
“네. 맞습니다.”
“그랬군. 이유를 알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네 그려. 하하하……”
“그렇게 궁금하셨어요?”
“당연하지!”
“그럼 진작에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이 사람아, 여기 오는 사람들 중에 복잡한 사연 없는 사람이 있는 줄 아나? 그래서 여기선 일에 필요한 것 말고는 물어보지 않는 게 법이라네.”
“하긴……”
“그런 이유라면 괜찮군. 가끔 뭔 해방운동이니 노동운동이니 하는 젊은 친구들이 이념이 어쩌고 무슨 원리가 어쩌고 민주니 평등이 어쩌고 하면서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분위기 흐리는 경우도 있어서 문제긴 하지만, 자네 같은 이유라면 딴 사람들이 알아도 뭐라고 하진 않을 게야.”
“그런가요?”
“여기 일하는 사람 중에도 한 때 제법 잘 나가던 사람도 드문드문 있다네. 그렇다고 해도 머리로 일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거지. 대부분 정직하게 일해서 버는 것이 좋은 사람들이거든. 그래서 그런지 복잡한 건 딱 질색하기도 하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몸이 가는 걸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이지.”
“네……”
“세상엔 참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어. 나 같이 배운 거라곤 이것 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평생 이 짓 해서 먹고 사는 사람도 있고, 잘 나가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망해서 정말 오갈 데 없이 몸뿐이라 이 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세상이 귀찮아 일부러 이 일을 찾는 사람도 있고. 참 자네 결혼은 했나?”
“아직 전입니다.”
“그래? 사귀는 사람은 있고?”
“아뇨.”
“흠… 내가 소개라도 좀 해줄까?”
“아닙니다. 아직은 결혼을 생각하고 싶지 않군요.”
“왜?”
“그냥요.”
“허허…… 그것도 사연이 있는 모양이로군.”
“……”
김광석은 왜 죽었을까? 가끔 김광석이 죽기 바로 전날 불렀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우연치 않게 그의 마지막 방송을 보았던 나는 다음 날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에 친구들이 심한 장난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것이 정말임을 알았을 때 또 다른 데자뷰를 보는 것 같았고, 깊이 감추었던 무서운 기억의 흔적이 나를 휘청이게 만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그 날, 나는 내 방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다음 날 다시 해가 뜰 때까지 온 몸을 떨었다. 어디선가 하얀 옷을 입은 엄마가 손짓하며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문을 열면 여전히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 쪽에 무섭게 눈을 뜨고 줄에 매달린 엄마의 모습이 보일 것만 같았다.
“나는 말야, 저 노래만 들으면 우리 애 생각이 나. 가끔 지 방에서 혼자 저 노래를 부르곤 했었거든.”
“자녀분요?”
“응. 큰 애. 살아있었다면 올해로 41살이 되지.”
“네……”
포장마차 기둥에 매달린 낡은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던 황십장이 소주를 목구멍에 털어 넣으며 다시 잔을 채웠다. 그리고 다시 털어 넣고, 채우기를 연거푸 세 번을 하고서 빈 소주병을 확인하곤 술 한 병을 더 시켰다.
“그 자식,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공부도 잘하고 대학도 떡 하니 지 가고 싶은데 붙고, 인물도 훤하고 성격 좋고 뭐하나 빠지는 게 없었는데 말야…… 허……”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게 말야…… 2학년 마치고 군대를 갔는데, 가서 몇 달 만에 갑자기 연락이 왔더라고. 애를 찾아가라고. 자살을 했다나? 어이가 없더군. 해서 허겁지겁 달려갔더니 정말 우리 애가 누워있더라고. 냉동실에서 차갑게 얼어서 말야. 기가 막히더군. 세상에 그런 일도 있을까 싶었어.”
“네……”
굴곡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시대도 어두운 때가 있고 치욕스러운 시간이 있고 고통의 시간이 있거늘, 하물며 버러지같이 살아가는 이름없는 민초의 삶이야 더 말할 것이 있으랴!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아무도 말을 안 해주더라고. 그 애가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얼핏 봐도 여기저기 멍자국에 상처가 한 두 군데가 아니던데 이런 저런 조사고 뭐고 간에 자살이라는 거야. 억울하고 원통하더군.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도 보고 민원도 넣어보고 했는데 다 소용이 없더라고. 나중에 세월 지나서 잊을 만 하니 뭔 의문사 조사를 한다고 난리를 치더니만 오만 군데서 찾아와서는 사람 속을 시끄럽게 하더구만. 차라리 처음부터 제대로 조사한다고 했으면 속이라도 답답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긴 시간 동안 하소연할 데 없이 속만 태웠는데 그 자식 가슴에서 그나마 겨우 묻어뒀다 싶었더니 지들 멋대로 마구 헤집고 말야…… 결국 마누라만 병 나서 또 아들놈 뒤따라 보내고 눈물도 다 마르게 하더라고. 그러고도 여태 살아있는 걸 보면 나도 참 용해. 그렇지?”
잔을 들어 나도 황십장처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목이 따갑도록 갈증이 밀려왔다. 포장마차를 흔들며 한 차례의 큰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어느새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서둘러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제길, 보아하니 내일은 비 때문에 일 못하겠군.”
“그러게요. 제법 많이 올 거 같네요.”
“뭐, 잘 됐지. 그 덕에 쉬기도 하니까.”
“쉬는 날엔 뭐하세요?”
“할게 뭐 있나? 그냥 빗소리 들으며 방바닥에 등 붙이고 누워서 잠이나 자는 거지.”
“건강 잘 챙기세요.”
“내 걱정은 마. 아직 20년은 끄떡 없어. 둘째 녀석 손주도 봐야 하고.”
“둘째도 아들인가요?”
“아냐, 딸. 그 애 때문에 내가 여태 살아있는 셈이지. 그 애도 없었다면 아마 애 저녁에 마누라 따라 갔을 거야.”
“네……”
“우리 딸 애가 결혼한지는 벌써 몇 년 됐는데, 아직 아이가 없어. 그래서 걱정이야. 몸이 어디가 안좋은지, 아니면 부부 사이가 문제가 있는지……”
“정상적인 부부들도 아이가 쉽게 들어서지 않는 경우가 많은 걸요. 조금 더 기다려 보세요. 곧 소식이 있겠죠.”
“그러면 좋겠구만.”
삶이 고행이란 건 살아가면서 더욱 느끼는 것이다. 또 내게 찾아오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 없는 삶의 무게를 느끼곤 한다. 누군가는 그렇게도 쉽게 살아가는 것을 대다수의 사람들은 몸부림치며 안간힘을 써야 하고, 때로는 그래도 되지 않아 심연 같은 좌절을 겪게 되곤 한다. 인생은 이렇게도 불공평하다. 제기랄!
택시를 타고 떠나는 황십장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한동안 비를 맞으며 그대로 서 있었다. 잊혀졌던 과거의 기억이 자꾸만 비 속에 선명해져 왔고, 그럴수록 마음은 점점 더 추워만 갔다. 전화기를 꺼내 이양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라면 지금 이 추운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얼마나 신호음이 갔는지 모른다. 그러다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멘트에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어디로 가야 할지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핸드폰 속에 있는 다른 이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 말아야 할 전화를.
“여보세요?”
“수호천사!”
“……”
“남편 들어왔어요?”
“아뇨. 오늘 아침 해외출장을 갔어요.”
“아이는요?”
“자요.”
“분당 M 아파트죠?”
“네.”
“몇 동인가요?”
“107동요.”
“30분 후에 아파트 옥상문 앞으로 나와요.”
“네.”
전화를 끊을 즈음 저기 달려오는 빈 택시가 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택시!”
천둥과 번개가 수시로 오가는 굵은 빗줄기 사이를 택시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이미 시간은 출발한지 40분을 넘기고 있었고 마음은 자꾸 조급해졌다. 그녀는 지금 내가 암시해 놓은 단어로 인한 최면 상태인 채로 아파트 옥상 문 앞에서 멍하니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만약 다른 누군가라도 그녀를 발견하게 된다면 향후에 난처한 입장이 될지도 모르거니와 혹여 나쁜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벌써 몇 번을 전화 했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그녀로서는 핸드폰을 챙겨 나가지 못했을 확률이 컸다. 공연한 충동적 행동 하나가 나 자신을 심하게 자책하게 하고 있었다. 기어코 20분을 더 지나 아파트 앞에 섰을 때, 나는 또 나 자신을 원망했다. 일반 아파트와는 다르게 이 아파트는 입구에 비밀번호가 있어야 문을 열 수 있는 구조. 전화도 되지 않는 지금 그녀에게 연락할 길은 없었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잠시 한쪽 옆에 서 있다 힘없이 돌아서는 순간 안에서 나오는 누군가로 인해 문이 열렸고 나는 다시 문이 닫히기 전 서둘러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다행히 나오던 사람은 처음부터 우산으로 앞을 가리고 있어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빠르게 솟는 엘리베이터마저 느리게 느껴졌고 마음은 이미 계단을 마구 뛰어올라가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중간에 서지도 않았다. 마지막 23층에서 다시 옥상을 향한 계단을 서둘러 올라갔다. 등도 없는 그곳은 그저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있는 비상구등이 그나마 희미하게 계단과 문의 형상을 알아볼 수 있게 해줄 뿐이었다.
옥상으로 나가는 문 앞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허탈한 실망감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없었던 것이다. 혹시나 싶어 문을 열어봤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도중에 최면이 풀렸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오히려 다행일 것이다. 별탈 없이 집으로 돌아갔을 테니까.
나도 이번처럼 암시단어에 의한 원거리 최면의 시도는 처음이었다. 과연 잘 되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사실 최면은 최면 대상자의 의지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대부분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을 최면의 상태로 이끈다는 것은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제대로 된 최면을 위해서는 대상자와 시술자간의 유대와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다. 상대방의 의지에 반하는 최면은 그야말로 고도의 최면기술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극히 어려운 일이다.
돌아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렇게 앉아있으니 공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나는 왜 그토록 무모하고 위험한 시도를 했었던 걸까? 만약 그녀가 내 뜻대로 이곳에서 나를 기다렸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그녀를 범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이후의 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시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상하게 나를 흥분시키던 그녀의 물기 어린 뽀얗게 하얀 피부. 모나지 않게 동그란 느낌의 눈, 코, 입, 그리고 얼굴의 형태. 대략 163, 4 정도 되어 보이는 키에 아주 마르지 않은 균형잡힌 몸매. 치마를 입었을 때 아래로 보이는 다리의 강렬한 육감적 모습. 내 물건이 급격히 팽창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나는 주체하기 힘든 육욕에 휩싸이곤 했고 지금도 그러했다. 전화기를 손에 들고 나는 망설였다.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다시 나오라고 할까? 시계는 이미 새벽 한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선생님!”
“헉!”
나는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서 뒤를 돌아보다 그만 휘청이며 계단 아래로 떨어질 뻔 했다. 간신히 난간을 붙잡고 균형을 잡은 나는 난간에 비스듬히 기댄 채 몇 계단 위에서 서있는 검은 코트의 그녀를 바라봤다.
“현주씨……”
“네, 선생님.”
일요일이라 병원 문도 열지 않는 데도 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병원으로 와서 상담용 의자에 누워 열선을 최고로 높여 놓고 담요를 덮어 잠을 청했다. 온 몸이 이렇게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울 수가 없었다. 샤워를 하고 나서도 몸의 피로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침대에 누워있자니 몇 시간 전의 일들이 영화처럼 선명하게 머리에 그려졌다. 강현주, 그녀의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 그 입술 속을 헤집던 내 혀에 느껴지던 전율스러운 감촉들. 그녀의 긴 숨소리와 뜨겁게 뿜어져 나오던 단내. 적절한 순간에 내 흥분을 이끌던 그녀의 신음소리. 손에 닿는 그녀의 매끄럽고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끈적하게 붙어오던 그녀의 살결들. 그녀의 몸 속에 마침내 들어섰을 때 느껴지던 그 짜릿하고 가슴 터질 것 같던 흥분감. 내 중심을 가득 잡아오던 무수한 지렁이들의 꿈틀거림 같은 신비한 감촉. 들고 날 때마다 리듬을 맞춰오던 그녀의 움직임. 그것은 줄다리기처럼 일정의 간격을 두고 서로의 힘을 겨누는 것처럼 격렬하고 때로 일방적이고 때로 하나인 듯 일치된 춤과 같았다. 출렁이는 그녀의 가슴과 느낌 좋은 유두를 한입 베어 물고 아이처럼 빨아 당길 때마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던 급격한 파동들. 그 파동을 타고 나는 점점 더 그녀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그녀는 나와 함께 깊고 거친 소용돌이 속에 몸을 던졌다.
그녀는 나를 기다리며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고 했다. 검은 외투가 그런 그녀를 어둠의 일부분으로 완벽히 동화시켜줘 누구라도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 앞으로 간 나는 그녀를 구석진 곳으로 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 눌렀다. 그녀는 아이처럼 내 손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고 마침내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손을 얹은 자세로 앉아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나는 지퍼를 내렸다. 금새 커진 육봉이 튀어나오며 그녀의 얼굴을 향해 무섭게 도드라졌지만 그나마 어둠이 그 무서움을 감소시켜줬다. 나는 내 물건을 한 손으로 잡고 그녀의 입술에 닿게 했다. 그리고 말했다.
“빨아줘.”
그녀는 아무 망설임 없이 두 손으로 내 물건을 잡고는 입술을 열어 내 물건을 받아들였다. 따뜻하고 축축한 그녀의 입안이 내 물건을 더욱 흥분되게 했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거칠게 그녀의 입 속을 찔러대고 싶었지만 그녀의 행동은 그저 단순한 반복에 불과했다. 이빨의 처리도 확실치 않아 조금 아프기도 했다.
“이빨이 닿지 않게. 혀와 입술로만.”
내 말에 따라 그녀는 즉시 자신의 혀와 입술만을 사용했다. 기술은 없었다. 그녀 스스로 그런 경험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머리로 생각해서 되는 것이 아닌 본능적인 움직임과 경험의 산물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부드러움이 주는 편안함에 나는 내 물건을 더 깊이 들이밀었다. 숨이 막히는지 그녀가 내 물건을 잡고 밀어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냥 받아들여!”
그 한마디에 그녀는 순종적으로 나의 분신을 받아들였다. 숨이 막혀 컥컥거리며 침을 흘리면서도 뱉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나를 더 흥분하게 했고 내 행동을 더 거칠게 했다. 나는 커질 대로 커진 내 물건을 그녀의 목구멍까지 깊이 밀어 넣었다. 목젖이 닿는 느낌이 확실해졌다. 기도가 막히고 숨을 쉬지 못하는 그녀를 느끼면서도 나는 더 깊이 넣기를 멈추지 않았다. 한 순간 내 움직임이 빨라졌다가 멈추었다. 서서히 내 물건도 작아져 갔고 그녀도 숨을 쉬는 것이 편해진 것 같았다.
아직도 그녀의 입안에 있는 내 물건을 천천히 빼냈다. 끝에서 끈적한 줄기 하나가 길게 흘러 내렸다. 그녀가 어떻게 할까 싶어 잠시 기다렸지만 그녀는 내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듯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삼켜.”
그녀의 목이 움직여 내 분신들을 넘기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다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집으로 가.”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 집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혹시 몰라 아이방의 문을 살며시 열어봤다. 창가로 들어오는 불빛에 깊이 잠든 아이의 모습이 보였고, 나는 그제서야 몸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엄마가 없었던 시간 동안 잘 자고 있어준 아이가 고마웠다.
그들 부부의 침실로 들어가서의 느낌은 아주 특별했다. 비록 남편이 해외출장이란 확실한 부재상태였을지라도 마치 그녀의 남편이 한 켠에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침대 옆 작은 등을 켜고 침대 끝에 서서 나는 그녀의 옷을 모두 벗겼다. 서두르지는 않았다. 한지로 감싸인 그 작은 등에서 나오는 빛은 은은하게 서서히 들어나는 그녀의 나신을 더욱 눈부시게 했다. 내가 자신의 옷을 벗기는 동안 그녀는 편안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나는 일부러 그녀의 눈을 보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의 속옷 하나만을 걸쳐두고 나는 핸드폰을 화장대 옆에 세워놨다. 동영상 녹음버튼이 눌러진 상태였다.
“벗어.”
내 말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마지막 속옷을 벗어서 바닥에 내려놨다.
“내 옷도 벗겨줘.”
부드러운 그녀의 손길이 나를 점차 아이처럼 만들어갔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 내가 아직 남자와 여자의 확실한 구분의 개념이 없던 시절, 내 옷을 벗기고 따뜻한 물이 받아진 욕조에서 내 몸을 씻겨주던 엄마의 손길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