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터미널의 그녀 (14)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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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섹스게이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3-14 06:28 조회 923회 댓글 0건본문
"이쪽이요?"
"더 오른쪽!!"
"여기요?"
"그렇지, 이제 조금 맘에 드네. 자, 나머지 마저 돌리고와!"
`즉시개통` 이라고 적힌 큰 입간판과 사은품을 가판대에 쌓아 둔 뒤에야 겨우 허리를 필 수 있던 나는 아르바이트 생 두명에게 남은 전단지 꾸러미를 넘기고는 의자에 허리를 붙혔다.
"하이고 삭신이야..."
이제서야 담배 한개비를 꺼내 오늘의 첫모금을 힘겹게 빨아본다.
제대 후 어려워진 집안 사정으로 인해 이어진 휴학-자퇴로 이어졌던 내 청춘은 뒤이어 보기 좋게 취업난이라는 큰 장애물에 부딪혀 나를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됐고, 청년 사장님이라는 허물좋은 명함 아래 힘겹게 옛 친구를 동업자 삼아 돈을 긁어모아 뛰어든 종착지는
"최신기종 오늘은 반값!! 부모님 효도폰은 공짜에요 공짜!!!"
휴대폰 대리점이었다.
요즘은 아이폰이라는 신기한 물건이 출시되어 시장이 한창 뜨거울 때였다.
"아이폰이라...세상 참 편해졌구만.."
목업으로 된 아이폰 샘플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감탄해마지않았다.
이 자그만한 핸드폰에서 인터넷도 ,음악감상도 전화도 모두다 된다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시대랄까..
"옛날엔 아이팟 한대면 세상 부러울게 없었는데.."
옛 기억을 더듬다가 문득 가슴한켠이 따끔거렸다.
아이팟...아이팟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그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넌 잘 살고 있는거니..."
입안에 담배가 갑자기 한없이 쓰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쓴 담배를 더욱 깊게 흡입하며 애둘러 몽롱해져보길 기대한다. 수 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 그녀는 그렇게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어지는 상처 정도로 남아있었다.
(애써 잊고 살았었구만.....왜 이제 와서 새삼..)
어느새 꽁초가 된 담뱃불을 비벼 끄며 고개를 저었다.
요 몇년 동안 반 강제로 그녀에 대한 기억은 가슴속에 봉인하다시피 묻고 살았었다..그 사이에 잊어보려 다른 여자를 억지로 만나도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었다.
마음 한켠에는 아직 그녀로 부터 받은 상처와
내가 남긴 상처들이 가시처럼 박혀 있는 것 처럼 이따금 나를 괴롭혔다.
두통이. 그녀와의 기억이 아찔했던 옛날일이 되살아난 듯 머리가 어지럽다.
나는 두 손으로 관자놀이 양쪽을 짖누르며 눈을 감고 조용히 옛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겐 군 제대 이후 생긴 버릇이 하나 있다.
싫은 기억이 들 무렵이면, 조용히 기억을 더듬어 시간순으로 나열하는 버릇이었다.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원인부터 결과까지를 나열하다보면..
간혹 해답을 찾기도 했지만, 최소한 스스로를 조금은 다시 되돌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줄곧 이 `정리`를 즐겨했다.
하나 부터 더듬어갔다.
그녀와의 만남부터 일방적인 헤어짐까지,
이제 그녀 얼굴조차 희미하게 떠오를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그녀와는 사진한장 남아있지 짧은 만남이었던 터라.
생각할 수록 더 애틋했고, 아팠던 기억이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빈 가게안에서 그녀생각에 잠겼던 나는..
"나 잠깐 나갔다 올께, 가게 좀 부탁할께."
무작정 몸을 일으켜 나갈채비를 했다.
"어디가는데?"
동업자 상식이 녀석이 컵라면에 물을 부으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본다.
"뭣 좀 사러..."
"뭘 사는데? 별일이네? 너같은 짠돌이가 뭘 사러간다니.."
"있어 그런게..한두시간 나갔다 올게, 대신에 저녁엔 내가 볼테니 부탁한다."
점퍼를 챙겨 입고 가게를 나서 지하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10월 초, 가을 바람이 슬슬 쌀쌀해지는 시기였다.
(가만있어보자...)
지하철 입구에 있는 지도를 찾아 눈을 훑으며 목적지를 찾아본다.
(남부터미널역이...3호선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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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터미널, 국제전자 센터.
남부터미널의 랜드마크이자 지금은 몇 안되는 게이머들의 성지.
예전에 비해서는 오고가는 인파는 뜸했지만 건물과 주변의 분위기는 여전했다.
나는 옛 추억을 하나씩 더듬으며 그녀의 흔적을 따라 걸었다.
그녀가 나를 붙잡았던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올라가 전자기기 매장을 향한다.
(`저겨저겨저겨`)
(`안팔아요`)
우리가 대화를 나누었던 그 공간.
(`탕수육 대짜요!! 중도 소도 아니고 무려 대!!!!`)
한창 청춘의 한가운데에 있었음을 새삼 실감한다.
나는 그녀와의 추억을 곱씹으며 가전기기 매장을 둘러보았다.
사람과 장소는 그대로지만 파는물건은 보다 첨단을 달리는 것들 뿐.
"안녕하세요 아저씨."
"어서오세요."
그 때 그 가게에 다시한번 발걸음을 옮긴다.
"그....재고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뭐 찾으시는데요?"
"아이팟 16기가...모델로..구할 수 있나요?"
"응 있죠? 좀 지나긴 했는데 아직 재고 있을겁니다."
예상 외로 사장님은 수월하게 대답했다.
"와...아직 있어요? 하하.."
"싼걸로 중고도 있는데 한번 보실라우?"
사장님은 작은 박카스 바구니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그 예전 누군가의 아이팟으로 훌륭히 사명을 다했을 녀석들의 명예로운 안식처가 있었다.
그렇게 이어폰과 본체가 뒤엉켜 장렬히 순장되어 있는 박스 다발안을 뒤적거리던 찰나..
"....................................헐.."
나는 그 안에서 굉장히 낮익은 녀석을 찾아내고 너무 놀라 탄식할 수 밖에 없었다.
핑크색 프리즘 하트 스티커.
괴상한 센스라고 놀려댔던 그녀의 취향이 다분히 담겼던 그 스티커.
내게 강탈해간 아이팟에 곧바로 붙혀버렸다가 욕조에 담가서 고장냈던 그 스티커와 똑같은 디자인의 스티커였다.
"아 그거? 얼마전에 중고로 들어온건데 아직 잘돌아가요 관리를 잘해서..저기 사설업체에서 배터리도 수동으로 갈아끼워서 좀 누렇게 변색되긴 했는데 싸게 줄게요"
"얼마 전이요?"
"네..한 2,3주 정도 됐나? 누가 갖고 와서 팔고 갔죠. 요즘 시대에 매입도 안받아준다고 했는데 반 강제로 강매시키고 가버렸어요..꼭 여기다 팔겠다고 하믄서.."
"헐...."
"요즘엔 거의 안 쳐주는 거긴 한데, 뭐 암튼 이렇게 찾는분이 계시니 중고로 매입을 안할수도 없고.."
아이팟을 만지작 거리던 나는 두근 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이거 제가 살게요 사장님, 그 혹시 죄송한데 파신분 연락처는 알 수 없으신가요?"
"알죠. 간혹 장물도 있고 해서 연락처 받고 매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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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정보 보호법을 들먹이며 고객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없다던 사장님의 완고함을 박카스 한박스로 정중하게 잠재우고 아이팟의 옛 주인 연락처를 확보한 나는 동업자 친구를 퇴근시키고 홀로 가게를 지키며
"하아....."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물끄러미 바라본 채 맹렬히 고민에 빠졌다.
그곳에는 휘갈겨 쓴 글씨로 이름없이 `판매자`라는 타이틀과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이걸 걸어...말어..."
뭐하나 확증은 없었다.
그냥 그녀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 쓰던 아이팟일수도 있다.
오늘 갑자기 불어닥친 변덕으로 인해 엉뚱하게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그냥 걸어나 봐?...말어?.."
정말 이 연락처가 그녀의 연락처라면 또 전화하여 뭐라 인사해야할 것인가..
"하아....."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답은 정해져있었다.
나는 답답한 가슴을 진정시키며 정중하게 다이얼을 하나하나 세어가듯 눌렀다.
`뚜르르르르르르르...`
".............."
`뚜르르르르르르르...`
"..........후우.."
`뚜르르르르르르르...`
오랫만에 느껴보는 묘한 긴장감에 목이 타기 시작한다.
`뚜르르르르르르르...`
".....................................(꿀꺽)."
`탈칵`
드디어 전화가 연결되었고, 나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여보세요?"
낮익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네, 누구세요?"
"저기, 갑자기 뜬금없는줄은 아는데요..."
"네??"
"제가 오늘 아이팟을 샀는데....요..."
"아이팟요?...아아...네..근데요?"
목소리를 듣는 동안 점점 확신이 굳어졌다.
"혹시...이거 탕수육 대짜에 사실 생각 없으세요?"
그녀가 확실했다.
"....................."
수화기 너머에선 한동안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몇년만에 들어보는 그 목소리.
가슴에 묻어뒀던 그녀의 목소리.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녀 -혜진이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탕수육 맛있는집...제가 알아요."
"하하..."
"거기가 어디냐면 남부터미널 쪽인데..."
"네!! 거기서 만나요 우리."
"푸흡.."
"한시간 뒤에 봐요. 꼭!"
"네..이번엔..꼭 만나요, 엇갈리지 말고."
수년만에 이어진 그녀와의 끈.
가슴이 벅차 올랐다.
친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황급히 집으로 달려가면서도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남은 시간을 세어보았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고 세수를 하면서도,
수시로 시계에 눈을 훔쳐 시간을 체크했다.
뜨거운 물을 받아 면도를 하고, 속옷과 다려놓은
양복을 꺼내 갈아 입으면서도, 시간을 체크한다.
구두에 묻은 먼지를 털고 약속장소까지 가는 길을
머릿속으로 두세번씩 체크해가며 시계를 훑어보며 -
오늘, 그녀를 만난다는 사실이 현실인지 애써 스스로 믿기지 않아
몇번이고 체크해보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그녀를 만나러 남부터미널로 간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남부터미널의 그녀는.
나를 어떤 모습으로 맞아줄까.
우리는 어떤 말로 인사해야 할까.
그녀는 매몰차게 떠났던 나를 용서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
답은 정해져있지만 아직 확실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를 보면, 바로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침표인줄 알고 있었던 인연이 쉼표로 바뀐 오늘,
나는 남부터미널의 그녀를 만나러 간다.